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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부정공>만오처사휘정빈가장(晩悟處士諱廷彬家狀)
晩悟處士諱廷彬家狀 府君諱廷彬字文彦號晩悟趙氏系出玉川以高麗檢校門下侍中璋爲鼻祖傳至諱元吉定策勳大匡輔國封玉川府院君諡忠獻號農隱與圃牧陶冶並稱五隱生諱瑜極事親之孝守罔僕之志 世宗命旌並褒忠孝生諱斯文參議生諱智崗 贈吏參以兄弟相好于今著稱生諱琛文科爲翰林成均館大司成外補慶州府尹六世祖諱爾重閫任行三道統制使 肅宗朝與四大臣有扶杜衛國之策辛壬獄起竟被追奪籍沒乙巳死事諸公同伸雪復官高祖諱斗臣以辛壬禍家嗣孫特命入侍除五衛將仍寵賜所御玉圈貝纓曾祖諱一溥通德郞祖諱秉德考諱翊烈俱隱德妣陽川許氏瓘女有女士行擧三男府君居長 純祖壬申十二月十四日生氣宇軒昻性度剛正言語簡黙形容端雅事親以愛敬持身以恭謹勤儉立家奉先致誠敎子姪義方交朋友信敬自以學業未充恨之執經史課兒孫九思九容揭諸壁夙夜警箴遭外內艱執禮遵制親戚故舊貧而不能婚葬者誠力多助凡事務持大軆不抱小節朔望拜謁家廟近遠出入則亦如之年猶七耋每當歲新則各展楸行未嘗少廢居家雍睦凄鄕醇謹嘗增修邑誌以明倫綱葺繕家譜敦叙源流其於親親仁民之道豈不有所補也哉嗚呼韙矣季胤旭鉉有一達交時任統制使屢請一席講舊嚴切戒止曰權門禍機汝將何取焉 高宗庚寅四月二十七日回巹稱慶人皆榮之粤明年辛卯七月十四日終于寢享年八十葬于順天住巖面柱洞將軍峴甲坐原配海州吳氏寅元女有婦德擧四男三女長曰縉鉉次曰昇鉉有文行次曰鳳鉉通政季曰旭鉉安一秀李閏在柳在洪婿也長房男淵正二房二男長即不肖淵舜次淵誠二女適張性鉉李貞燮三房四男淵注淵文淵武淵相早夭六女適金善明李鍾烈許審丁模眞金昌洙許鍾四房三男淵奎淵學夭逝淵台五女適張基柱李禎燮李永淳鄭基庸鄭鍾顯內外曾玄不盡錄嗚呼府君之世世躋昇平世契則有心菴賢佐之立朝戚親則有雲石昆仲之達位而以若材器德行之蘊抱終不求一資半級一布衣八十年於草野萊爲昭代逸民而止抑以爲府君之不幸也歟抑以爲府君之幸也歟高尙之風義不可泯沒故敢此敍次俾俟立言君子之知德焉 不肖孫 淵舜 謹述 만오처사휘정빈가장(晩悟處士諱廷彬家狀) 부군(府君)의 휘는 정빈(廷彬) 자(字)는 문언(文彦) 호(號)는 만오(晚悟)이다。 조씨(趙氏)는 옥천(玉川|)이 관(貫)이며、 고려(高麗)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장(璋)이 시조(始祖)이다。 원길(元吉)때 와서는 책운(策勳)으로 대광보국(大匡輔國)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이되어 시호(諡號)는 충헌(忠獻)이라 하고 호(號)는 농은(農隱)이라 하여 포은(圃隱)·목은(牧隱)·도은(陶隱)·야은(冶隱)과 함께 고려(高麗) 五은(五隱)이라 하였고、 아들 유(瑜)는 사친지효(極事親孝)를 다하고 망복(罔僕)의 뜻을 지켜 세종(世宗)께서 정려(旌閭)를 명(命)하고 아울러 충효(忠孝)의 포상(褒賞)까지 내리셨다。 그 아래로 사문(斯文)은 참의(參議)를 지냈고 지강(智崗)은 증직(贈職)으로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냈는데 형제가 상호(相好)하여 지금까지 칭송(稱誦)하고 있다。 또 그의 아들 침(琛)은 문과(文科)로 한림(翰林)이 되어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을 지냈으며、 보직(補職)으로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역임하였다。 부군(府君)의 六세조(六世祖) 이중(爾重)은 곤임(閫任:장군의 임무)으로 三도통제사(三道統制使)가 되었고 숙종(肅宗)때는 四대신(四大臣)과 함께 부사위국(扶杜衛國)의 계책을 가졌다가 신임(辛壬)옥이 일어난 뒤에 적몰(籍沒)을 당했었는데 을사년에 신임무옥(辛壬誣獄)에 죽은 제공과 함께 신설(伸雪) 복관(復官)되었다。 고조(高祖) 두신(斗臣)은 신임화가(辛壬禍家)의 사손(嗣孫)이라 하여 입시(入侍)를 특명(特命)하여 五위장(五衛將)을 제수하고 또 총애한 나머지 임금이 친히 쓰던 옥권패령(玉圈貝纓)을 하사(下賜)하였고、 증조(曾祖) 일부(一溥)는 통덕랑(通德郎)을 지냈고、 조(祖)는 병덕(秉德) 고(考)는 익렬(翊烈)인데 모두 은덕(隱德)이 있었다。 비(妣)는 양천(陽川) 허씨(許氏) 관(瓘)의 딸로 여자의 본분을 가추었으며、 三남(三男)을 두었는데 부군(府君)이 그중 장남(長男)이다。 순조(純祖) 임신(一八一二)년 十二월 十四일에 태어난 공(公)은 기상(氣像)이 헌출하고 성격(性格)이 강정(剛正)하였으며 말은 간묵(簡默)하고 모습도 단정하였다。 어버이 섬길 때는 애경(愛敬)으로 하고 자기 몸가짐은 공근(恭謹)하게 하였으며、 집안 살림은 검소하게 하고、 선영(先塋)을 받들때는 그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자질(子姪)을 가르칠때는 의방(義方)으로 벗을 사귈 때는 신경(信敬)으로 하였고 또 학업(學業)을 충분히 연마하지 못한 것을 한하여 경사(經史)를 가지고 아이들을 가르켰으며 구용구사(九容九思)를 써서 벽에다 걸어두고、 아침 저녁으로 경계를 하였으며 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는 예(禮)와 법제(法制)에 맞게 하였고 친척고구(親戚故舊)중에 가난하여 혼인과 장사도 제대로 못하는 이가 있으면 힘을 다해 도와주는 등 대부분의 일을 언제나 대체(大軆)에 기본을 두고 소절(小節)에 얽매이지 않았다。 초하루 보름이 되면 가묘(家廟)에 가 배알(拜謁)하고 바깥 출입을 할 때도 마찬가지로 가묘에 가서 배알을 한다。 그리하여 나이 七순이 되어서도 새해가 되면 선산(先山)에 성묘하는 일을 빠트리지 않았고、 또 집에 있을때는 옹목(雍睹)하고 밖에 나가면 순근(醇謹)하였으며、 일찌기 읍지(邑誌)를 만들어 강(綱)을 강(講)하였고 가보(家譜)를 수즙(修葺)하여 원류(源流)를 펴냈으니、 어찌 친친인민지도(親親仁民之道)에 도움이 없었다고 하겠는가? 더욱 위대(偉大)한 것은 끝 아들 욱현(旭鉉)에게 친한 벗이 있었는데 때마침 통제사(統制使)가 되어 누차 한자리에 모여 옛날 처럼 강론(講論)하며 지내고자 하자 부군(府君)이 엄히 말리며 말하기를、 『권문(權文)이란 화(禍)가 미치기 쉬운 곳인데 너는 어찌 그를 취(取)하려 하느냐?』라고 하셨다。 고종(高宗) 경인(庚寅) 四월 二十七일은 부군(府君)의 회혼(回婚)이여서 사람들이 모두 영광으로 여겼는데 그 다음해 신묘(辛卯) 七월 十四일 침소에서 세상을 뜨니、 나이는 八十세였다。 묘소는 순천(順天) 주암면(住巖面) 장군봉(將軍峴) 갑좌원(甲坐原)이고 부인(夫人)은 해주 오씨(海州吳氏) 인원(寅元)의 딸인데 부덕(婦德)이 있었다。 四남 三녀를 두었는데 큰 아들 진현(縉鉉) 다음 아들 승현(昇鉉)은 문행(文行)이 있었고 그 다음 봉현(鳳鉉)은 통정(通政)이었고、 끝 아들은 욱현(旭鉉)이었으며、 안 일수(安一秀) 이 윤재(李閏在)·유 재홍(柳在洪)은 사위이다。 그리고 장방남(長房男)은 연정(淵正) 이방(二房)은 二남(二男)인데 큰 아들이 곧 불초(不肖) 연순(淵舜)이고 그 다음은 연성(淵誠)이며 두 딸은 장 성현(張性鉉)·이 정섭(李貞燮)에게 시집 갔고 三방(三房)의 四남(四男)은 연주(淵注)·연문(淵文)·연무(淵武)·연상(淵相)인데 연상이 어려서 죽었다。 그리고 六녀(六女)는 김 선명(金善明)·이 종렬(李鍾烈)·허 심(許審)·정 모진(丁模眞)·김 창수(金昌洙)·허종(許鍾)에게 시집갔으며 四방(四房)의 三남(三男)은 연규(淵奎)·연학(淵學)은 일찍 죽고、 연태(淵台)이며、 五녀(五女)는 장 기주(張基柱)·이 정섭(李禎燮)·이 영순(李永淳)·정 기용(鄭基庸)·정 종현(鄭鍾顯)에게 시집갔다。 안팎의 증손과 현손은 다쓰지 않는다。 아! 부군(府君)은 태평스러운 세상에 태어나、 심암(心菴)과 같은 훌륭한 이가 조정(朝廷)에서 활약하고 운석(雲石)과 같은 훌륭한 친척(親戚)이 주위에 있으나 부군(府君)은 재기(材器)와 덕행(德行)을 간직하고서 一자반급(一資半級)도 요구하지 않은 채 한 포의(布衣)로 八十평생을 초야(草野)에 묻혀 좋은 세상에 일민(逸民)에 그치고 말았으니、 이는 부군(府君)을 위하여 불행(不幸)이란 말인가? 아니면 다행이란 말인가? 고상한 풍의(風義)를 그대로 사라지게 할 수가 없어 감히 이렇케 써서 세상의 표본이 되는 군자(君子)가 알아주기를 기다린다。 불초손(不肖孫) 연순(淵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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